1.
소년이 집에 돌아오지 않은 지 삼일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 중 그를 걱정하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소년이 재미있는 곳에 다녀와 본다, 라고 말한 것도 한몫했지만 본래 그 세 명이 소년을 걱정하는 타입들도 아니었다. 바이스가 아주 잠깐, 괜찮은 걸까, 하고 걱정의 기색을 비췄지만 클라리체의 알아서 나올 거란 말에 그 역시 동감한 구석이 있기 때문에 금세 논의는 멈췄다.
참새가 몇 번씩 밖으로 나갔다 돌아왔다. 참새는 소년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눈치였다. 그러나 참새는 여전히 포레스트에게만 관심을 갖고 있었고, 딱히 소년이 없다고 불안한 모습은 아니었다. 소년을 걱정할만한 요소는 거의 없었다. 소년은 늘 자기 멋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데로 살면서, 대부분의 것을 이룰 수 있는 자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들은 3일정도의 부재에 그를 걱정하는 일은 없었다. 소년이 그저, 자기가 즐거운 걸 하러 떠났다고 생각하기에.
2.
소년은 조금 지루한 표정으로 무리를 지켜봤다. 언제나 정해진 시간에 사람들이 모인다. 새로운 말씀을 듣기 위해서다. 그러나 새로운 말씀이라고 해봤자, 언제나 중점을 비껴나가는 말들뿐이고, 그런 겉도는 말들에 신도들은 일정하게 돈을 낸다. 그 풍경을 3일째 보고 있자니 슬슬 지루해졌다. 소년은 일부러, 한 명 한 명을 차근차근 보며 여러 가지 추측을 했다. 저 사람은 어찌하여 여기에 왔는지, 무슨 소원을 빌고 있는 지, 와 같은. 그러나 이내 답을 낼 방법이라곤 직접 가서 이야기해보는 것밖에 없었고, 그들은 굳이 이야기를 나눌 만큼 흥미로운 느낌을 주진 못했다.
슬슬 갈까.
소년은 손으로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다 문득, 일주일이면 그 말로만 듣던 구원자를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닿았다. 붉은 눈을 몇 번 깜박이며, 허공을 떠돌아다니는 말들을 흘러 넘겼다. 일주일정도는 이 놀음에 더 넘어가줄 수 있었다.
이야기가 끝나고 검은 천으로 뒤집혀있는 상자를 향해 사람들이 줄을 서서 돈을 넣었다. 남자 하나가 일어나서 뒤에 앉아있던 아이들을 일으켰다. 소년은 순종하듯 남자의 손짓에 맞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등 뒤에서 한 아이가 소년에게 속삭였다. 시니스터. 소년이 머글세계에서 사용하는 가명이었다. 소년도 작게, 아이에게 속삭였다. 왜 그래, 스텔라? 저녁시간에 끝자리에 앉기야. 그래, 그럴게. 아이들을 인솔하던 남자가 둘을 쳐다봤다. 소년은 천천히 눈을 휘며 남자를 보았다. 남자가 시선을 돌린다. 양들은 그의 걸음에 맞춰서 자신들의 숙소로 돌아갔다.
소년은 며칠 새벽동안, 모두가 잠이 들었을 때 복도를 돌아다녔고 짧은 시간동안 여러 정보들을 얻었다. 소년이 있는 줄 모르고 떠드는 소리에서 이곳이 일종의 피라미드 구조로 이루어진 종교집단이며 이곳이 총본산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지하에 오래된 설계도를 통해서 이 건물이 과거 기숙학교용도로 건설되었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알게 된 단 하나의 사실도 자신과 같은 방을 쓰는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피곤한 눈으로 하품을 한 번 하면 물어오는 피곤하냐는 질문에 그저 자리가 바뀌어서 잘 못 잤다고 말할 뿐이었다.
소년은 이곳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몇 명은 이곳에 온지 몇 달이 넘어간 아이들도 있었다. 나름의 텃세를 부리며 말하는 아이들. 자신이 마지막으로 이곳에 들어온 아이이고, 33번째 아이라고 했다. 왜 굳이 33번째일까. 소년은 교리 곳곳에 보이는 숫자 3의 흔적들을 보았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자신의 보호자들과 사이가 좋지 않거나 보호자가 없는 아이들이었다. 그런 아이들을 데려와서 씻기고, 먹이고, 좋은 옷을 입힌다. 돈을 노린 행동은 아니었다. 소년은 가장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가정을 떠올렸고, 새벽녘에 그 가정에 맞는 근거들을 찾아냈다. 단지 그 시기를 명확히 알 수 없을 뿐이었다. 금방인지, 아니면 조금 더 남았는지.
저녁시간에 되어 자리에 앉을 때, 소년은 정확히 테이블 끝자리에 앉았다. 이곳에선 아이들의 식사는 시간뿐만 아니라 먹는 음식의 종류도 정해져있다. 아이들은 어느 요일에 어떤 음식이 나오는 지 정확히 외웠다. 정해진 음식의 재료, 단지 요리법이 바뀐다. 식사 이후에는 단 과자를 먹을 수 있다. 소년은 적당히 음식을 먹고 반은 버리면서, 과자를 먹었다. 먹을 거에 무언가를 탄 눈치는 아니었다. 그랬다면 몇 달 되었다는 아이가 다른 반응을 보였을 테니까.
33명이나 되는 아이들은 서로서로 각자의 그룹을 이뤘고 각자의 위계질서를 가졌다. 소년은 금방 자연스레 그 무리 중 한 곳에 편입했다. 가장 우두머리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장 아래도 아닌 무리. 적당히 눈에 띠고 적당히 눈에 띠지 않는 위치. ……라고 해도 본인이 눈에 띤다는 것은 부정하진 않았다. 소년이 구석자리에 앉자 얼마 안 있어서 그에게 말을 걸었던 스텔라를 포함해 여러 아이가 그 주변에 자리에 앉았다. 아이들의 수다가 이것저것 시작됐다. 소년은 적당히, 예전에 그랬듯이 아이들의 말에 고개만 끄덕이기도 하고, 적당히 답하기도 하며 이야기들을 흘러들었다.
“그 소문 들었어? 지하에 어떤 괴물이 산데.”
“사실 여기는 그 괴물을 키우기 위한 곳이래.”
“지하에?”
소년은 되물었다. 포크에 꽂힌 닭고기를 다시 내려놨다. 소년의 반응에 말을 했던 아이가 신이 나 말을 했다.
“응, 이거 톰이 말한 건데.”
톰은 이곳에 들어온 지 가장 오래된 아이들 중 하나였다. 아이들 무리의 대장. 자신의 이름을 들은 건지 다른 테이블에 있던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소년은 톰과 눈을 마주치고 웃었다. 눈치 채지 못한 아이는 한참 이야기를 했다.
“몰래 지하 쪽으로 갔다가……하얀 털을 가진 짐승을 봤데! 그림자가 엄청, 엄청 컸다고 하더라고. 이후에는 보지 못했지만!”
지하에 그런 거 못 본 것 같은데. 소년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말하지 않았다. 시선을 피하지 않는 톰을 가만 보다가 이내 먼저 고개를 돌렸다. 이야기를 한 아이에게 그렇구나, 하고 답하며 다시금 포크를 들었다. 말없이 조용히, 입에 음식을 넣었다.
“여기가 만약에 정말 괴물을 키우는 곳이면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군가가 불안하게 물었다. 순간적으로 아이들의 불안한 기색이 술렁인다. 소년은 이곳에 도착해서 옷을 갈아입혀지고 갖고 있던 물건을 압수당했다. 대신 다양한 놀거리 및 장난감과 맛있는 음식을 제공 받았다. 그 과정에서 머글들이 사용하는 부엉이, 그러니까, 핸드폰도 가져간다. 소년의 부엉이는 밤마다 소년을 찾아오고 있지만, 다른 아이들은 자신의 부엉이를 만날 수 없으니 불안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소년은 짐짓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설마. 그리고 정말 그런 거라면, 도망가야지.”
“구원자가 구해줄 거야.”
소년의 말이 끝나마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소년은 웃음을 거두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렸다. 톰이었다. 이곳에 오래 있던 만큼 구원자를 가장 많이 봤고, 교리를 많이 알고 있는 자. 그의 주변에 있는 아이들 몇이 옳다고 동의했다. 톰과 그의 곁에 있는 아이들은 좀 더 좋은 옷을 입고 있고, 좀 더 좋은 혜택을 받고 있다. 가시적으로도 비가시적으로도 사실 아이들 내에 계급을 나눴다. 소년은 그래, 그렇구나. 하고 톰에게 동의했다. 톰이 소년을 노려봤다. 소년은 그저 웃었다. 톰이 노골적으로 적의를 드러내다가, 식당을 떠났다.
소년은 잠시 생각했다. 자신이 지하에서 열어보지 않은 문이 떠올랐다. 알지 못하는 잠금장치라 열어보는 걸 다음 기회로 미뤘던 문이었다. 지하, 깊숙한 곳. 문을 열고 복도로 들어서 다시 문을 맞이하는. 맨 처음 문은 열쇠를 사용하는 자물쇠였기 때문에 쉽게 열었지만, 그 다음 문은 자물쇠 말고도 무언가 기계로 잠겨 있었다. 리덕토를 사용해 뚫을까 고민하다가, 그만뒀었지. 괴물의 소문이 혹시 그곳에서 나온 건가,
소년이 학생시절부터 하는 행동이 있었다. 소문이 나오면, 그 소문의 근원을 확인해볼 것. 어떤 이야기가 있는 지 확실하게 봐볼 것. 소년은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렸다. 소년은 웃었다.
3.
‘요즘 계속 이곳을 돌아다니던데, 무슨 고민이라도 있니?’
그 질문에 소년은 발걸음을 멈췄었다. 낯선 질문이었다.
소년은 자신이 눈에 띠는 외모라는 것을 알고 있고, 그 외모가 다른 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다. 그래서 갑자기 말을 걸어오는 사람에게도 별로 놀라지 않는 편이다. 전화번호를 묻거나, 어느 쪽에서 사는지, 이곳에는 어쩌다 왔는지, 이름은 무엇인지. 그런 질문들. 소년은 적당히 거짓으로 이름을 알려주고, 적당히 떼어내는데 익숙했다.
그러나 그날 물어온 사람의 질문은 낯설었다. 최대한 인상 좋게 웃고 있는 그는 소년에게 이름이 무엇인지 어디에 사는지를 묻지 않았다. 대신해서 그에게 고민이 있냐고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셨나요? 라고 소년은 대꾸했다. 몇 가지 이유를 댄다. 소년은 속으로 웃었다. 상대는 착각했다. 그러나 소년은 고민이 있는 사람이 되기로 결정했다. 소년은 올리버를 연기할 때를 떠올렸다. 고민이라고 할 것까지 있는 소년으로 연기하진 않았지만, 그 시기에 적당히 그 또래의 아이가 할 수 있는 고민이 문제인지 알았다. 가족문제.
상대가 맞추는 순간 소년은 어떻게 알았냐는 듯, 적당히, 놀란 척을 하며 그에게 호응했다. 가족들이 내가 무엇을 하든 신경을 쓰지 않는다―그야 신경 쓰든 말든 덱스터가 자기 멋대로 할 거란 걸 모를 리 없다―, 용돈도 주지 않아서 매번 내가 스스로 써야한다―그야 본인이 제일 돈이 많으니까―, 집에 돌아가지 않아도 날 전혀 찾지 않으신다―어차피 본인 맘대로 하는 이하생략―,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이대로 사라져도 부모님은 모를 거라는 듯, 진실에서 기초한 거짓된 이야기들을 진실인 마냥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어. 상대의 말에 소년은 조금 의아하게 보았다. 어떻게? 어차피 진짜도 아닌 고민이었다. 자신을 미성년자로 보는 눈치인데, 무엇을 원하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상대가 손을 내밀었다. 소년은 손을 잡았다. 그리고 소년은 차를 타고, 산 속으로 들어갔다. 돈을 노린 납치인가? 소년은 잠시 생각했다. 보통 금전을 노린 납치의 경우에는 집안 조사가 이루어진 후에 할 텐데, 자신이 조사되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한참을 들어가서야 도착한 건물은 낡고 큰 편이었다. 소년은 다른 아이들을 소개 받았고, 옷을 갈아입고, 소지품을 검사받았다. 소년은 별 물건을 갖고 있지 않지만 지팡이를 뺏기는 건 조금 곤란했다. 소년은 자신에게 소중한 막대기라고 주장하여 지팡이를 뺏기지 않았다. 그들이 가장 실수한 부분이었다.
밤이 되면 소년은 모든 아이들의 잠이 들었는지 확인했고, 다시 한 번, 지팡이를 휘둘러 확실하게 아이들을 재웠다. 창문으로 참새가 큰 날개를 펄럭이고 들어왔다. 발톱에 양피지를 꾹 쥐고 있었다. 양피지를 확인했다. 해리 포터에 대한 소식이었다. 확인하고, 다시 참새를 내보냈다. 딱히 참새를 통해 편지를 전하게 할 사람은 없었다.
오늘 들었던 소문을 확인하러 갈 시간이었다. 소년은 지팡이를 손에 챙기고,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잠겨 있는 문을 간단히 열고, 다시 잠근다. 새벽의 당직자가 순회하는 복도를 피해서 지하로, 지하로 내려갔다. 과거 이중으로 잠겨있던 문을 향해. 며칠 발품을 팔았기 때문에 소년은 금방 목적지에 도착했다.
소년은 기계로 되어있는 낯선 잠금장치를 만지작거렸다. 잠금장치는 여러 개였고, 그 중 하나가 소년의 눈에 무척 낯선 잠금장치였다. 처음 봤을 때는 어떤 잠금장치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소년의 눈이 잠금장치를 훑었다. 지금은 알 것 같지만. 잠금장치를 만지던 손이 문을 만지작거렸다. 손으로 똑똑, 두드렸다. 쇠. 단단하고, 차갑고. 그러나 쉽게 무너트릴 수 있다. 어떻게 할까. 소년은 다시 한 번 잠금장치를 만졌다. 이렇게, 그리고, 저렇게. 소년의 손가락이 몇 번 이를 쓰다듬다 곧 지팡이를 그러쥐었다. 휘저어졌다. 알로호모라.
철컥. 띠리링. 찰칵. 덜크럭. 여러 개의 잠금장치들이 동시에 풀려났다. 소년은 문을 밀었다. 끼이익, 육중한 쇠문이 밀려났다. 문과 벽 사이에 어느 정도 공간이 생겼다. 소년은 한 발짝 안쪽으로 걸어 나가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소년은 누군가와 눈을 마주쳤다.
“히, 흐익!”
검은 홍채를 인식하는 순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소년의 시야에서 순식간에 얼굴이 사라졌다. 쿵, 무언가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년은 마저 문을 열고 들어와, 다시 문을 닫았다. 문 너머에 있는 건 넓은 공간이었다. 사람이 살고 있는 흔적이 구석구석 보이는, 방. 눈앞에 누군가 들고 있었던 걸로 보이는 그릇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소년은 천천히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침대가 보였다. 이불이 불룩 튀어나와있다. 이불 안에 있는 무언가가 떨고 있다. 소년은 잠시 웃음이 났지만 소리는 내지 않았다. 발소리를 거의 내지 않고 침대 앞에 선 채, 조용히, 조용히, 소리를 내지 않았다.
침대를 살폈다. 볼록 튀어나와있는 이불은 하얀색, 매트를 덮은 걸로 보이는 이불보도 하얀색이었다. 벽지도 하얀 벽지. 생활의 흔적에 의한 누런 끼가 돌긴 했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많은 곳이 하얀빛이라 병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다. 침대 옆 벽에 빨간 색의 버튼이 붙어있었다. 가장 이질적인 색이었다. 이불이 꿈틀 꿈틀하다가, 조금, 올라갔다. 안에 있는 보였다. 하얀 머리카락. 힉, 하고 다시 숨었다. 소년은 이제 슬슬 말을 걸 필요성을 느꼈다. 소년이 가볍게 인사했다.
“안녕.”
이불이 한 번 크게 진동했다. 소년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뒤편에 있는 책상을 발견했다. 지팡이를 휘둘러 의자를 자신의 앞까지 끌고 왔다. 그리고 한 번 더 휘둘러 바닥에 떨어졌던 그릇 역시 자신의 손 위로 가져왔다. 무언가 먹었던 흔적이 있는 그릇이다. 친절하고 다정한 목소리로 이불을 향해 말했다.
“잠시 앉아도 될까, 그대?”
그리고 기다렸다. 이불이 한 번 더 떨렸다. 안에 있는 이가 이불에서 얼굴을 내밀 때까지 소년은 조바심을 가지지 않고 그 자리에 서있었다. 대신 그릇을 살펴보았다. 그릇은 어린이들이 쓸 법한 귀여운 캐릭터들이 그려진 그릇이었다. 양 여러 마리가 그릇의 둘레를 빙 돌고 있었다. 이를 보고 소년은 다정하게 말했다.
“그릇의 무늬는 양이야? 귀엽네.”
한 번 더 이불이 진동했다. 이불이 조금씩 들리며 하얀 머리칼이 드러났다. 그리고 곧, 검은 동자와 마주했다. 시선이 몇 번 왔다 갔다 하며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얼굴이 보이자 그제야 소년은 의자에 앉았다. 어린 아이의 얼굴. 소년은 아이에게 그릇을 건넸다. 아이가 쭈뼛쭈뼛 그릇을 받았다. 그리고 물었다.
“새 ‘양’이야……?”
아니면 신도야……? 우물쭈물 아이가 덧붙였다. 양. 그리고 신도. 양은 어린 아이를 뜻하고 신도는 이곳에 있는 어른들을 의미했다. 소년은 눈을 둥글게 휘며 말했다.
“양이기도 하고, 신도이기도 하고. 또 동시에 둘 다 아니란다.”
정확히는 그냥 아닌 거지만, 소년은 그런 척 하고 있기 때문에 두루뭉술 답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아이의 말은 느릿하고 발음이 분명치 않았다. 소년은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나도 뭐라고 이야기를 해줘야할지 모르겠네, 그대. 악마, 라고 하는 쪽이 제일 나을까?”
그래, 그 말이 제일 옳았다. 소년은 맞아, 악마야. 라고 한 번 더 덧붙였다.
“악마……?”
아이의 시선이 다시 한 번 흔들렸다. 아이가 우물쭈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침대 옆 빨간 버튼 쪽으로 슬금슬금 손을 뻗으려했다. 뻗기 전 소년은 다시 한 번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는 넌 누구니?”
질문에 아이의 손이 멈췄다. 슬금, 다시 손을 이불 속으로 집어넣었다. 아이는 소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소년의 말에 아이가 우물쭈물 다시 느리고 분명치 못한 발음들로 답을 했다.
“나, 난, 구원자……야. 악마는 내가 없애야 한뎄어…….”
의외의 답을 받아 소년은 잠시 멈칫했다. 소년은 천천히 아이를 살폈다. 머리카락은 하얀색, 홍채는 검정. 대략 10살에서 12살 사이로 보이는 어린 아이.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지만 아까 그릇을 받았을 때 언뜻 보인 옷은 이 병적으로 하얀 방과 어울리게 하얀 옷이었다. 환자복 같기도 했다. 소년은 손으로 턱을 괬다. 이 작은 아이가 ‘구원자’라고?
“그래? 그러면 여기는 어디니?”
“……내 방…….”
“평소엔 늘 여기서 지내니?”
“……?”
이해하지 못한 듯 아이가 소년을 쳐다봤다. 아이의 손이 그릇을 만지작거렸다. 소년은 질문을 바꿨다.
“그대는 이곳에서 나오지 않는 걸까?”
“구원이, 필요할 땐 나가야 돼. 그래서 도와줘야 돼.”
아이는 분명 소년을 경계하는 기색임에도 소년의 말에 제법 성실하게 답했다. 아이의 시선은 계속 몇 번이고 빨간 버튼을 향했다가 이내 소년에게 돌아왔다. 소년은 직감적으로 저 버튼을 아이가 누르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렇지 않으면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소년은 천천히, 그러나 여유를 주지 않고 다시 또 질문을 이었다.
“구원하는 건 뭔데?”
“악마가, 오지 못하게……신도들을 깨끗이 정화해 주고 불쌍한 양들을 늦지 않게 천국으로 보내주는 거야.”
아이의 발음은 여전히 또렷하지 못했지만 뒤의 이어진 말만큼은 마치 정해진 문구라도 있는 듯 막히는 구석 없이 술술술 튀어나왔다.
“그걸 네가 하는 거니?”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발음조차 명료하게 아이가 덧붙였다.
“나는 구원자니까.”
그 말을 듣고 소년은 가볍게 웃었다. 의외인데. 소년은 구원자란 존재가 이 종교를 움직이는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화려한 언변이라던가 혹은 기막힌 상술 등을 통해서 자신을 구원자로 꾸미고 다른 사기꾼들과 협심하여 불쌍한 사람들을 속이는 인물. 그러나 눈앞에 있는 자신을 구원자라고 말하는 아이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정말 그가 구원자인지는 직접 구원자가 나온다고 한 날에 봐야 알겠지만, 소년은 사실 이 아이가 정말 구원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밌는 기삿거리를 찾은 마냥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소에는 그럼 뭐하니?”
“수, 수련.”
“수련? 수련은 정확히 뭐인데?”
“수련은……수련…….”
더 이상 설명할 방법을 모르는 눈치였다. 소년은 자세하게 캐묻지 않았다. 장난스런 미소가 얼굴에 찼다. 어떻게 할까. 소년은 아이를 가만 보았다.
“넌 새 같구나.”
“……?”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아이가 소년을 빤히 쳐다봤다. 소년은 아이의 눈동자를 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재밌는 걸 찾아버렸다. 하얀 새장 속에 까만 눈동자의 새. 꽁꽁 숨겨둔 이 새를 찾아버렸으니 이제 이 새를 새장 밖으로 꺼내줄지, 그저 구경을 할지, 그것도 아니라면 망가트릴지 선택할 차례였다.
4.
소년은 신도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현재 우리가 듣고 있는 교리는 정확히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 자신들은 어떤 의미로 이곳에 있는지, 그리고 구원자란 어떤 존재인지. 그 질문에 신도들은 소년이 교리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이 기쁘다는 듯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소년의 태도에 의심하는 자는 성인들 중에는 없었다. 이러한 그를 가장 경계한 건 톰이었다. 그러나 처음 소년이 열심히 물어본 날은 쉽사리 나서지 않고 단지 소년을 노려보기만 했다.
소년은 아이를 다시 찾아갔다. 한 번 열어본 문은 주문을 외지 않아도 쉽게 열 수 있었다. 소년은 가볍게 지팡이를 휘둘러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다시 새까만 눈과 마주쳤다. 아이는, 다시 화들짝 놀라며 이불 속으로 들어갔지만 이번에는 얼굴은 계속 내민 채였다.
“안녕, 그대.”
소년은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곧 지팡이를 휘저어 자신의 앞에 의자를 갖고 왔다. 그리고 그 의자에 별 말 없이 앉았다.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이가 물었다.
“너도 구원자야?”
“글쎄.”
소년은 턱을 괴며 가볍게 답했다. 아이는 어제처럼 빨간 버튼을 힐끔 쳐다봤지만 금방 시선이 소년에게로 돌아왔다. 어제보다는 경계가 풀린 눈치였다. 아이가 더듬더듬 말했다.
“나도, 그, 그런 거, 돼.”
“그래? 정확히 어떤 거?”
“무, 물건을 흔들거나 움직이거나.”
“~. 보여줄 수 있니?”
“지금은 안 돼……힘이 빠져나간데.”
소년은 가볍게 웃었다. 그러면 나중에 보여주렴. 독촉하지 않고 다정한 말투로.
소년은 아이와 긴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아이의 말은 어눌하고 일반 상식에서 벗어났지만 그렇다고 사고가 나이대에 비해 떨어진 건 아니었다. 아이의 방에는 침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장난감이 들어있는 장난감 상자도 있었고, 책상과 책장도 있었다. 책장에는 누군가가 선별한 모양새의 책들이 꽂혀있었고, 아이는 그 책들을 닳을 정도로 계속해서 읽었다고 답했다. 대부분 동화나 이야기책들. 그리고 주로 권선징악의 교훈을 가진 이야기. 아이는 아닌 척 했지만 바깥을 궁금해 했고, 소년은 그 바깥에 대해서 가볍게 모험 소설의 내용도 섞어서 이야기를 들려줬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온다는 건 비밀이야. 비밀을 지켜주면 내일도 찾아올게. 그렇게 말을 했다. 결과적으로 소년은 추궁 받지 않았으니, 아이가 소년에 대해서 말을 하지 않은 듯 했다. 설령 추궁 받는다고 해도 크게 문제될 건 없었다. 소년은 이 상황에서 잃을 것이 없었다.
“학교에 대해서 궁금하다고 했지?”
그 이야기를 할 때쯤에는 아이의 머리가 이불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
다음날도 소년은 신도들에게 물어봤다. 특히 구원에 대해서 자세히 물어봤다.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어떤 느낌인지, 구원자는 어떤 존재인지. 신도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구원이란 건 깨끗한 이들에게만 가능한 행위다. 구원을 받기 위해선 끊임없이 정화가 필요하다. 정화가 끝마쳐진 이들은 성수를 마시고 이 후 깨끗한 불꽃과 함께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다고 했다. 소년은 교리서를 보고 싶다고 이야기했지만, 아이들을 담당하고 있는 신도는 안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소년은 아쉬운 척하며 발걸음을 옮겼다.
소년은 이번에도 아이에게 다시 찾아갔다. 아이에게 가장 좋아했던 책이 무엇인지 묻고 자신이 알고 있는 이야기 중 가장 비슷한 부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아이는 바깥에 대해서 물어봤다. 이번에 들려줄 이야기는 바다였다. 아이는 바다를 직접 본 적이 없다고 답했다. 호수도 마찬가지였다.
“호수 속에 들어가면 인어들이 살아.”
“인……어?”
“그래.”
“어떤데?”
아이의 눈이 빛난다. 소년은 그 전에, 하고 말을 멈췄다. 아이가 의아한 듯이 소년을 쳐다봤다. 그 까만 동자를 한참 마주보던 붉은 눈이 웃음기를 감추지 않고 물었다.
“구원에 대해서 이야기해줄래?”
“악마가, 오지 못하게 신도들을 깨끗이 정화해 주고 불쌍한 양들을 늦지 않게 천국으로 보내주는 거…….”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다른 거.”
“어, 어떤 거?”
“그냥, 과정이라던가.”
아이는 한참을 고민했다. 그냥, 하는 건데. 라고 답했지만 소년은 그 정도로의 답으로 만족할 리 없었다. 소년은 아이를 천천히 기다렸다. 아이가 더듬더듬 말을 했다.
“구원받을 양들에게 내 성수를 줘서……영혼을 올려 보낸 후에, 몸도 깨끗이 하늘로 돌려보내.”
정화가 끝마쳐진 이들은 성수를 마시고 깨끗한 불꽃과 함께. 아이의 눈이 단호하게 빛났다. 한치의 의심도 없는 그 자신만만한 빛. 그리고 숨기지 못한 자부의 표정. 자신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믿음. 아이가 곧 말을 끝맺었다.
”그러면 그들은 구원 받아.”
다음날. 초조함을 미처 숨기지 못한 건지, 톰이 소년을 불렀다. 아이들이 다 같이 보드게임을 하고 있을 때였다. 톰이 소년이 이름을 부를 때 모두의 시선이 둘에게 쏟아졌다가 곧 톰이 성질을 내자 다들 눈치를 보며 시선을 돌렸다. 소년은 이런 식의 행동에도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톰을 비롯해 그 무리가 소년을 벽 쪽에 몰아넣고 둘러쌓다. 그들은 압박감을 주려는 행동이겠지만 소년은 그저 톰이 키가 큰 편이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어린 걸로 기억하는데. 소년의 생각을 알 리가 없는 톰이 소년에게 말했다.
“너 요즘 무슨 생각이야?”
“~. 그렇게 말하면 무슨 뜻인지 모르겠는걸.”
소년은 웃었다. 상대의 초조함이 느껴졌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뺏길까봐 느껴지는 두려움, 통제되지 않는 존재에 대한 불안감, 작은 사회지만 권력에 대해서 예민하다. 오히려 작은 사회이기 때문에 권력에 예민한 걸지도 모른다. 어렸을 때일수록 더더욱 이에 대해 서툴면서도 직감적으로 민감하다. 소년은 알고 있다. 톰이 자신에게 느끼는 초조함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아이들에게 권력을 주는 데 큰 영향을 끼치는 건 어른이다. 아이들의 생활에 대한 통제권을 톰이 갖고 있는 건 어른이 묵인해주기 때문도 있다. 그런데 소년이 갑자기 어른들과 사이가 가까워지자 불안해진 것이다. 몸만 컸지 속은 여전히 어린이인 아이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신도들한테 붙으면 네가 뭐 좀 유리해질 것 같냐? 헛수작 하지 마.”
어린 아이들의 협박은 솔직하고 곧다. 이런 협박은 그 누구도 넘어가지 않아. 소년은 손을 뻗었다. 손이 뻗어오자 톰이 흠칫하고 뒤로 물러섰다. 소년은 뻗었던 손을 거두고 자신의 입가를 짚었다. 협박을 하려면 차라리 내가 갖고 있는 지팡이를 뺏어서 부러트린다던가, 그런 협박을 해야지. 그런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어리고 순진한 아이들, 양. 소년은 이내 웃는 얼굴로 알았어, 조심할게, 정도로 말을 마쳤다. 무리가 물러서자 아이들이 시니스터, 하고 소년을 불렀다. 소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자리에 돌아갔다.
다음 밤도 소년은 아이를 찾아갔다. 아이는 이제 빨간 버튼을 쳐다보지 않았다. 소년은 여전히 다정한 말투로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들려줬다. 소년은 잠깐 웃었다. 약간 기시감이 들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다른 이에게도 있었는데.”
“다른 이……? 어떤?”
아이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생기 있는 얼굴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소년이 손을 뻗었다. 아이가 움찔하며 뒤로 물러섰다. 소년은 가만히, 기다렸다. 아이가 눈치를 보다가 다시 긴장을 풀었다. 소년이 천천히 느리게 손을 움직여 아이의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문득, 소년은 아이의 머리카락 뿌리 쪽은 하얀 색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본래, 하얀 머리가 아니구나. 일부러 하얀색으로 염색한 걸까. 하얀색이 과한 집착을 느꼈다.
“글쎄. 굳이 표현하자면 가족? 에 가깝겠는데.”
가족과는 다르지만. 소년은 문득 그들의 관계를 설명할 만한 단어가 별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동료라고 하는 표현이 오히려 어울릴까.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에는 걸리는 것들이 존재한다. 비즈니스적 관계라고 말하기에도 걸리고. 소년은 처음 이곳으로 올 때 했던 거짓말을 상기했다. 어찌됐든 가장 비슷한 용어는 이것이었다.
“그래, 가족정도구나.”
“가족이 있어……?”
“그럼. 너에게도 있단다?”
혹은, 있었겠지. 소년은 덧붙이는 생각을 말하지 않았다. 아이가 고개를 가만 저었다. 구원자는 가족이 없어. 구원자인걸. 소년은 당장에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대신에 자신의 ‘가족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들려줬던 아이는 그래, 귀여운 아이란다? 나를 많이 따르고. 책을 모으는 걸 좋아하는데 모으고 싶어 하는 책이 좀 어려워서 모으는 걸 도와주고 있지.”
그것 외에도 관계를 정의하기 위해 필요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소년은 그 정도에서 멈췄다.
“다른 사람도 있어?”
“응. 있어. 두 명. 한 명은 예쁜 여자인데, 생활에 있어서 아는 게 별로 없는 그 아이와 나 때문에 이것저것 고생중이란다? 본인도 예쁘지만 예쁜 사람들을 좋아해서 사진을 갖고 싶어 하기도 하고.”
아이의 눈이 반짝였다. 예뻐? 응, 그렇단다. 만나보고 싶다는 말이 나올 것 같은데, 아이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남은 다른 사람은 누구냐고 보챘다.
“다른 하나는 자주 우리랑 있지는 않은데. 사귀는 사람이 있거든. 둘이 사이가 좋단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포기하고 있던 것들을 전부 뒤집어엎기로 결정한 아이지.”
“인어공주처럼?”
가볍게 웃었다.
“조금 다르지만, 사랑을 위해 목을 도려냈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일맥상통할지도.”
도려냈다는 게 무슨 의미야. 아이의 질문에 소년은 다정히 비유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그러고도 새벽 길게 한참, 이야기가 계속 되었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또 해줄게. 이것저것 재밌는 이야기들이 많단다. 소년이 내일도 오겠다는 말을 남기며 자리를 떠날 때 아이가 뒤늦게 한 마디 했다.
“구원할 때, 와?”
“언제인데?”
아이가 구원자라면 소년이 구원자를 만날 수 있는 날을, 소년은 알고 있다. 그러나 정작 아이는 이렇게 답했다.
“금방이랬어…….”
“나는 그때까지 있긴 하겠지만, 구원인거니?”
성수를 먹이고, 영혼을 깨끗하게 해준다는 그것.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위해서 힘을 비축하고 있다고. 그 힘이란 게 무엇일까. 소년은 그 힘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서 그저 기대되네, 라고 답했다. 아이의 눈이 반짝인다. 내가 너도 구원해줄게. 소년은 그 말에는 답하지 않고 웃으며 방을 떠났다. 나는 그대에게 악마라고 했었던 것 같은데.
아이들을 담당하는 어른이 바뀌었다. 좀 더 젊은 나이대의 사람이었다. 소년은 그가 종종 예배시간에 힐끔힐끔 자신을 자주 쳐다보던 신도들 중 하나란 걸 알았다. 소년은 그에게 가서 아이처럼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교리서를 보고 싶어요. 아주 잠깐만요. 궁금해서요. 저도 구원받을 신자잖아요, 그렇죠? 고민하던 신도가 여기서 보라며 방 한 곳에 데려가 책을 빌려줬다. 소년은 빠르게 모든 내용들을 읽어 내렸다. 그리고 얼마 길게 읽지 않고 어려워서 모르겠다고 변명하며 책을 돌려줬다. 전부 읽었지만. 그 중 소년은 가장 중요한 한 장면을 떠올렸다. 구원자로 표현되는 하얀 성자가 한 손에 횃불을 한 손에 성수가 담긴 잔을 들고 내려온다. 3번 성수를 마시고 3번 불타오른 33마리 양들. 이들의 고기는 굶주린 신자들의 배를 채웠다. 신자들은 이윽고 이를 통해 죄를 씻고 축복을 채워낸다. 더 이상 그들은 악마의 위협을 받지 않는다.
구원이라. 소년은 아이를 보며 웃었다. 아이는 더 이상 이불을 뒤집어쓰지 않았다. 아이는 소년에게 말했다. 신도들은 나한테 바깥이야기는 잘 안 해줘. 필요가 없다고. 저런. 소년은 안타깝다는 듯 답했다. 밖에도 거의 나가지 못한다고 했다. 아이는 이중문으로 잠겨 있는 방 안에서 생활하고 있다. 소년은 감옥과도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는 손을 느릿하게 뻗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아이는, 가만히, 그 손길을 받으며 말했다. 요즘에 낮에 잠을 많이 자. 새벽에 깨어있어서. 그렇구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더 해줄까?”
소년의 말에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년은 아주, 오래되고, 거의 입에 담지 않던 케케묵은 이야기를 하나 끌어올렸다.
“전쟁은 아니?”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리석은, 이들이. 싸우는 거야. 그걸 구원해주려고, 그 전쟁에, 구원자가, 필요하기도 하고…….”
소년은 키득거렸다. 맞는 말이네. 그러나 동시에 틀린 말이었다. 아이가 이어 교리서의 몇 구절을 읽었다. 전쟁이 일어나 악마에게 홀린 어리석은 이들이 서로를 죽일 때 성자가 나타났다는 부분이었다. 소년은 눈을 둥글게 휘었다. 아이의 많은 사고는 교리서를 통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소년의 사고는 경험에 의해서였다.
“전쟁에 있어본 적이 있단다. 꽤 시간이 지난 일이구나.”
거기서 부모님이 돌아가셨지. 소년은 소곤거렸다. 아이는 물었다. 그게 무슨 의미야? 죽었어. 죽음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는 곳으로 가는 거야. 구원이 아니라? 전쟁에서 구원을 못 받고 죽으면 지옥에 간다고 했는데, 지옥에 간거야? 글쎄. 구원받았을지도 지옥에 갔을지도 모르지만 난 그분들이 좋은 곳에 갔으리라고 믿는단다. 동시에 그저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하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 소년은 아이를 가만 바라보며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너는 죽음에 대해서 모르는 구나.”
아냐, 라고 답하는 아이에게 소년은 다시 한 번 분명히 말했다. 교리서에서만 죽음이 나오는 게 아니잖니. 다른 곳에서 본 죽음의 모습과 같은지 한 번 보렴. 소년은 졸려하는 아이를 눕히고 그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잘 자렴. 아주 오래 전 소년의 부모가 그에게 했던 것처럼.
그 날은 분위기가 묘하게 변했다. 젊은 신도들은 표정을 굳힌 채 아이들에게 하나하나 행동할 것들을 말했다. 식단이 변화했다. 화려하고 맛있는 음식이었지만 본래 정해져있던 음식과는 다르다고, 소년과 지내는 아이 중 하나가 소곤거리며 말했다. 소년은 톰을 쳐다봤다. 그의 표정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이들에게 자유를 아예 안 주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느 정도 자유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소년에게는 지금껏 듣고 보았던 것들을 토대로 몇 가지 맞물려 만든 가설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을 우선시에 놓고, 그 다음 것들을 차례대로 순서 매겼다. 그 다음 하나씩 가설을 기각했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나왔는데 소년이 앞으로 일어날 일의 상황을 모를 리 없다. 이제 슬슬 아이를 어떻게 할 건지 결정할 차례였다. 소년은 셈을 했다. 두 번 자고 나면 그날이었다. 이제 정말 결정해야겠네. 소년은 아이의 방에 들어갔다.
아이는 소년을 기다리고 있었고 이윽고 그를 반갑게 맞이해줬다. 아이가 기대에 찬 눈으로 물었다.
“오늘은 무슨 이야기를 해줄 거야?”
아이의 검은 눈동자가 기대에 차있었다. 소년은 아이의 머리카락 뿌리 쪽이 새하얗게 염색되었단 사실을 눈치 챘다. 병적으로 하얀 방에 갇혀서 병적으로 하얗게 칠해진 아이가 금색과 붉은색의 소년을 어느순간 부터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러게. 어떤 걸 해줄까.”
소년은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해줄까? 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곧 의아한 듯 물었다.
“부모님이랑은 왜 안 지내? 다른 3명이 가족이고. 그럼 형제야?”
“아니, 다르단다. 부모님은 죽었으니까 당연히 지낼 수 없단다.”
아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쳐다봤다. 소년은 저번에 아이에게 간단한 과제를 내주었다. 그것에 대한 답을 기다릴 수도 있고, 아니면 지금 이해되지 않은 것들을 해결하고 싶은 걸 수도 있다. 그러나 소년은 그 의아한 시선을 부러 무시하고 말했다.
“가족이란 건 반드시 핏줄로 이어져야만 가족인 것도 아니란다. 나는 그 아이들을 아끼고, 그 아이들은 글쎄, 나를 아끼는 것 같진 않지만.”
재밌는 말이라고 소년 혼자 키득거렸다. 아이는 여전히 의아한 시선이었다. 소년은 그 시선에 아랑곳 안 하고 이야기했다.
“이중에 여자아이가 가장 생활에 대해서 이것저것 알고 있는 아이라고 했지? 저번에 전자렌지였나……. 거기다 계란을 돌려서 펑, 하고 터졌단다. 그것 때문에 거기 안이 난장판이 되었는데 치워내도 다시 작동은 안 하여서 그 아이에게 맡겼단다.”
전자렌지가 뭐야? 그림으로 그려줄까? 소년은 책상 위에서 종이와 펜을 갖고 와 그 위에 전자렌지를 그렸다. 아이는 고개를 갸웃했다. 잘 모르겠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볼 수 있길 바란단다, 그대. 소년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었다.
“또, 쇼핑을 간 적이 있는데. 라티가……습관적으로 이름을 말했네. 책을 모으는 걸 좋아하는 아이란다. 커다란 백화점이란 곳을 갔었지. 그런데 위층에 올라가는 커다란 박스가 있는데, 흐응, 그걸 무서워하더구나. 예전에 감옥에 갇혀있었던 적이 있어서 그러는 것 같아서. 지금처럼 이야기를 해줬지.”
지금처럼? 그래, 지금처럼. 이렇게 마주보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좀 달랐지만. 아이는 잠시 고민했지만 그에 맞춘 비유를 생각해내지 못한 눈치였다. 소년은 다른 이야기로 넘어갔다.
“인어공주 아이는, 하하. 이렇게 이야기한다는 걸 알면 오웬이 별로 좋아하지 않으려나. 아, 그 아이의 연인은 나랑 친구란다. 둘이 같이 가면 이게 좋지 않을까? 하고 장소를 추천해줬었지. 정말 갔는지는 모르겠지만, 세 명 중에 그 아이가 내 말을 제일 잘 듣는 것 같은데……. 후후. 이제 슬슬 도와줄 때이기도 하네.”
“도와줘?”
“응. 그 아이가 명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듣진 않았지만, 그의 가족에게 죽음 혹은 그에 가까운 절망을 주고 싶어 하겠지.”
아이의 입이 열렸다. 아이가 걀국 느릿하게 물었다.
“……죽음이, 뭐야? 내가 정말, 죽음을 몰라?”
아이의 검은 동자가 금발의 소년을 오롯이 쳐다봤다. 그러나 눈동자 속에 섞여있는 당혹감, 혼란, 그런 것들이 한 번 넘실거렸다. 하루는 짧지만 동시에 길다. 나이가 어린 아이일수록 한 초 한 분 한 시간이 어른과 비교했을 때 길다. 시계조차 없는 방안에서 아이는 시계의 초침소리를 들었을 거였다. 소년은 다정히 물었다.
“생각해봤니?”
“……신데렐라……어머니, 죽었데. ……백설공주, 어머니도…….”
소년이 소곤거렸다. 다정한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그리고, 그 다음에는? 더 깊이 생각했니?
“죽, 으면 천국에 간다는데. ……그건 구원, 아니야?”
붉은 눈동자가 웃었다. 둘이 같은 거 일까?
“……그렇지만, 죽음은, 슬, 픈 거래……. 구원은 그렇지 않아.”
아이의 얼굴에 떠올랐던 자부를 떠올린다. 자신이 사람을 구원해준다는 자부. 아이는 자신의 이름을 갖고 있다. 아이는 아주 예전에 기억을 갖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억은 구원자로써의 자신으로만 존재하고, 아이는 몇 번이고 구원이 좋은 일이라는 것을 학습하고 반복했다. 갇혀있다는 걸 아이는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이를 명제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깥에 대해선 궁금해 하고, 호기심 많고, 머리도 좋았다. 안쓰러운 아이. 소년은 다정하게 아이의 얼굴을 쓸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네가 하는 건.”
구원이 아니야.
아이의 눈동자가 커진다.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웃었다. 소리를 내지 않고 입으로만 말했다. 구원이 아니야. 아이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아니야. 바로 튀어나왔다. 어눌하지 않은 분명한 발음. 아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공격이라도 받은 것처럼 아이가 비명에 가깝게 외쳤다. 아니야. 난 구원자야. 난 할 수 있어! 무엇을? 소년은 물었다. 아이가 구원을! 그렇게 외쳤다. 소년이 손을 휘저었다. 순식간에 방 안에 있던 많은 물건들이 둥둥 공중을 떠다니기 시작했다. 아이가 비명과도 같은 외침을 멈췄다. 소년은 몸을 일으켜 물건들이 떠있는 그 속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걸어가며 소년은 나긋하게 말했다.
“죽는다는 건 말이야. 구원도 무엇도 아니란다. 지옥에 가는 것도 아니고 천국에 가는 것도 아니지. 몸을 잃고 죽는다는 거란다.”
그 말에 아이가 뒤늦게 아니야, 라고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알고 있다. 소년이 지금 6번 새벽을 그와 함께 지새우며 수많은 이야기를 할 때 아이가 무의식적으로 많은 사고들을 막아버리고 있었다는 걸. 소년은 아이의 부정을 무시한 채 다정히 말했다.
“인어와 사랑을 속삭이던 내 친구 하나도 탑에서 고꾸라져 떨어지고 그 목숨을 잃었지. 인어는 영원히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서 나를 저주해. 나에게 소원을 빌었던 많은 아이들이 나를 도와주다가 죽었어. 그 아이들의 소원은 내가 이루어주지 않는 이상 그 자리에 영원히 멈춘 시계가 되었지. 내가 필요로 한 얼굴을 가진 아이는 죽음을 통해서 현실에선 만날 수 없는 가족들을 이윽고 만나러 갔어. 이제 더 이상 그들을 우린 볼 수 없지. 그런 게 ‘죽음’이야. 그대가 정말 생각하는 게 구원이라면, 그대가 구원자라면.”
그 말을 멈추자 물건들이 동시에 제자리로 떨어졌다. 소년이 아이를 도발했다.
“지금 내 눈 앞에 증명해주겠니? 이런 식의 힘을 갖고 있다고.”
아이의 눈동자가 떨린다. 구원의, 날이. 그렇게 말했다가 다시 한 번 그럴 리 없다고 아이가 웅얼거린다. 자신은 구원하는 거라고. 소년이 다시 한 번 부추긴다. 그런 힘이 있단 걸 나에게 증명해줘, 그럼. 아이가 결심한다. 눈을 꾹 감는다. 아이는 교리서의 구절을 읊는다. 양팔을 뻗는다. 계속해서 구절을 읊다가 노래를 부른다. 소년은 웃었다. 그럴 수 있을 리가 없지. 아이는 머글이다. 자신과 다르게. 그리고 그들이 아이에게 괜히 힘을 비축했다가 구원의 날에 사용해야된다는 말을 하는 것도 아닐 거였다.
소년은 다시 아이에게 걸어갔다. 아이가 눈을 떴다. 방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 하얀 성자는 한 손에 횃불을, 한 손에는 잔을 들고 나왔지만 하얀 구원자의 손에는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다. 애초에 그 손엔 아무것도 쥐어지지 않는다. 아무도 쥐어주지 않는다. 소년이 다정히 아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무 힘도 없는 네가 하는 건
죽음일까, 구원일까?
아이의 눈동자가 커진다. 아니야, 아니야, 하고 아이가 중얼거렸다. 혼란에 빠진 아이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계속해서 미친 듯 중얼거렸다.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아니야. 난 구원자야. 내가 하는 건 구원이야. 그럴 리 없어. 난 구원자라 여기 있는 거야. 그 말들을 듣다가 곧 소년은 방문 앞으로 갔다. 그리고 다정히 웃으며 말했다.
“구원의 날 때 보자, 그대.”
그때까지 나름대로 결론을 내주길 바라. 소년의 말에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황망한 검은 눈동자에 소년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그 날이 구원의 날일지 죽음의 날일까. 하얀 새장 속에 갇힌 새의 목을 한 번 쥐었다가 풀어주곤 소년은 방을 빠져나왔다.
5.
소년은 자신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다가 이내, 오랜만에 눈을 감고 조용히 불렀다. 그들을.
내일 오전에 내가 신호를 주면 머글 경찰에 신고 좀 해주겠니?
소년은 그날 새벽에는 아이를 찾아가지 않았다.
6.
오늘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아이들은 모두 아침에 한 명씩 따로 몸이 씻겼다. 말 그대로의 표현이었다. 옷도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혀졌으며 색은 하얬다. 소년은 아이가 입고 있는 옷을 문득 떠올렸다. 신도들은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들고 가지 못하게 막았지만 소년은 지팡이가 없으면 나가지 않을 거라고 강경히 말했다. 소년에게 교리서를 보여줬던 신도가 결국 그 지팡이를 들어서 같이 가기로 했다. 그 정도면 괜찮았다. 가까운 거리에만 있으면.
신도들의 분위기는 엄숙했다. 아이들에게 제법 친절히 웃어주던 그들의 표정은 엄격했고 행동 하나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소년은 이곳에 가장 오래있던 톰에게 시선을 던졌다. 아무렇지 않은 듯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늘 이래왔잖아, 라는 말로 수습하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얼굴에 서린 긴장을 읽어냈다. 다른 때와는 다른 것. 소년은 검지로 자신의 입술을 짚었다. 3과 하얀색에 대한 집착. 오늘의 날짜에도 3이 존재했다.
서른 세 명의 아이들 모두 준비가 끝났다. 아이들을 아이돌이라고 적어야만 할 것 같았다. 신도 하나가 가면을 썼다. 가면? 가면을 쓴 것은 처음 보았다. 소년은 가만히 그 가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톰쪽을 쳐다봤다. 아이는 가면에 대해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오래 지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가면은 익숙한 모습인 모양이었다. 정작 아이들에게는 가면을 쥐어주진 않았다. 엄숙한 분위기로 신도들은 아이들을 둘러싸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아이들은 맨발로 풀숲을 걸었다.
도착한 곳은 낯선 곳이었다. 매일 발걸음을 옮겼던 예배당이 아닌 건물 바깥 쪽 컨테이너였다. 소년은 돌아다니다가 안에도 들어가 봤으나 처음 들어가 본 아이들이 술렁거렸다. 모든 아이들이 전부 이곳을 낯설어했다. 컨테이너는 제법 컸다. 문 안쪽으론 재단이 보였고, 가운데는 움푹 팬 장소가 있었다. 아이들은 그 장소에 모여졌다. 아이들이 직감적으로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으나 그 누구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그 주변을 가면을 쓴 신도들이 둘러쌓았다. 재단 앞 쪽에 덩치가 큰 신도 하나가 말했다.
“구원자님께서 오십니다.”
그 말에 모든 신도들이 재단 쪽을 쳐다봤다. 재단 뒤편 커튼에서 세 명의 인영이 드러났다. 똑같이 가면을 쓰고 있는 신도들 둘과 그 신도들의 손을 하나씩 잡고 있는 하얀, 구원자. 까만 눈동자가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흠칫, 시선을 피하는 게 보였다. 소년은 웃었다. 소년의 웃음을 보자 신도 하나가 소년을 노려보았다. 소년은 그 시선을 알았지만 무시했다. 단지 잠시, 자신의 지팡이를 갖고 있는 자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구원자님, 이 물에 축복을…….”
구원자와 함께 나타난 신도 중 키가 작은 신도가 말했다. 그 말에 구원자는 엄숙히, 재단 위에 올려져 있는 물 잔에 손을 얹었다. 구원자가 눈을 감고 중얼거린다. 재단이 흔들렸다. 잔도 같이 흔들렸다. 신도들 몇 명에게서 감탄이 쏟아졌다. 아이들 역시 감탄을 내뱉었다. 덜컹이는 것을 보며 소년은 잠시 웃었다. 마법은 확실히 아니었다. 머글 생활을 하면서 소년은 한 가지 짐작할 수 있었다. 기계인 모양이었다.
구원자가 말을 끝내자 덩치 큰 신도가 구원자가 물에 축복을 내렸다고 고했다. 구원자의 양손을 잡고 등장했던 신도 둘 중 키가 작은 쪽이 그 잔을 들고, 다른 한 명과 함께 천천히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이 축복의 물을 마실 것을 권유했다. 아이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나서지 않자 잔을 들지 않은 신도가 바로 곁에 있는 아이 한 명씩을 붙잡고 물을 먹이기 시작했다. 그걸 보던 덩치 큰 신도가 손을 들었다. 신도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축복을 받아 구원을 받으리. 하얀 성자와 양들이여 그 구원을 내리라. 구원자의 목소리도 함께였다.
소년의 앞에도 축복의 물이 다가왔다. 소년은 가만 그 잔을 내려다봤다. 그러나 마시지 않았다. 단지 가만히 그 잔에 들어간 물을 바라봤다. 특별히 색이 있는 건 아니지만 소년은 대부분의 것들을 짐작하고 있었다. 신도 하나가 어서, 하고 강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아, 소년은 한숨을 쉬고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생각보다 너무 재미가 없었다. 그리고 눈을 휘었다. 시선을 돌려 똑바로, 구원자를 쳐다봤다. 소년은 다정하게, 그리고 분명히 말했다. 아이에게 확실히 들리도록 또렷하게.
“결정했니? 네가 하는 게 구원인지, 죽음인지.”
구원자는 분명히 들었다. 그는 노래를 뚝 그쳤다.
소년의 옆에 있던 신도들도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게 무슨, 신도가 당황해 소년을 보다가 곧 소년의 시선을 따라 구원자를 쳐다봤다. 덩치 큰 신도가 구원자에게 속삭이며 무언가 독촉했다. 구원자가 노래를 다시 시작했으나 곧 다시 입을 닫았다. 다른 신도들도 이상함을 눈치 채고 노래를 멈췄다. 웅성거림이 들렸다. 덩치 큰 신도가 손을 들며 진정하라고 표시했다. 그 사이에 톰이 소년의 등 뒤로 다가와 날카롭게 속삭였다.
“미쳤어?”
“응.”
톰의 말에 소년은 가볍게 웃었다. 소년의 대답에 오히려 톰이 입을 다물었다. 소년은 고개를 뒤로 돌렸다. 톰의 얼굴이 보였다. 눈을 휘며 미소 지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미쳐있었단다.”
뭐, 그건 중요한 게 아니잖니? 그렇게 덧붙일 때 그 말을 할 때 소년의 팔을 잔을 들지 않은 신도가 붙잡았다.
“너 이 녀석 뭔 말을 하는 거야! 성수를 마셔야지,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혼나고 싶어?”
“수면제가 들어간 물을 먹고 싶지 않은데, 그대.”
그 말에 순간 신도가 숨을 들이켰다. 덩치 큰 신도도 그들을 보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하지 않았으나 소년은 긴장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어느새 웅성거림도 멈추고 시선이 소년에게 몰렸다. 소년에게는 익숙한 상황이었다. 소년은 키득거렸다.
“재밌는 놀이라고 생각하고, 지켜봤는데, 죽는 건 좀 곤란해. 쉽게 죽지도 않고.”
그 말을 하자, 신도가 소년의 입을 확 틀어막았다. 소년은 당장에 그 손을 밀치지 않았다. 아이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저게 무슨 말이야? 설마? 아니야, 자기 입으로 미쳤데잖아. 하지만 진짜면? 잔을 든 신도가 아이들에게 조용히 하라고 타박했다. 덩치 큰 신도가 말했다. 일단 끌어내. 소년의 입을 막았던 신도가 소년의 팔을 붙잡으며 끌어내려는 듯 힘을 줬다. 소년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소년은 아까 지팡이를 갖고 있던 신도를 쳐다봤다. 소년이 손을 뻗었다. 아씨오. 신도 중 하나가 갖고 있던 지팡이가 순식간에 소년의 손에 쥐어졌다. 소년은 바로 지팡이를 자신의 몸을 잡고 있는 이의 머리에 겨눴다.
쾅!
그 순간, 장내가 조용해졌다.
“아아……. 내 몸에 손대지 말겠니? 기분 나쁘니까.”
신도가 으, 억 소리를 내며 소년의 발밑에 무너졌다. 으어어어, 하는 비명소리가 들렸다. 자신의 터진 귀를 붙잡고서는 비명을 지르는 거에 소년이 이윽고 가볍게 웃으며 다시 지팡이를 휘둘렀다. 신도가 그대로 벽을 향해 날아갔다. 날아오는 신도를 다른 이들이 피헀다. 쾅! 이윽고 신도가 기절했다.
소년은 다시 지팡이를 휘둘렀다. 잔이 휙, 소년의 손으로 날아왔다. 소년은 날아온 잔을 쳐냈다. 잔은 바닥으로 그대로 엎어졌다. 헉, 하고 누군가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말을 잃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누구야, 넌, 그런 말들을 무시하고 소년은 잔을 들고 있던 신도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연이어 덩치 큰 신도 역시 쳐다봤다.
“수면제를 먹여 33명의 아이들을 잠재우고, 그대로 이 건물과 함께 불태운 후, 어떻게 해? 아이들의 고기를 먹어? 아니면 잿가루를 물에 타?”
소년의 말에 아이들이 크게 수군거렸다. 불에, 타? 우리를 죽여? 진짜야? 비명과도 같은 말들이 쏟아졌다. 소년은 그들의 말에 답해주지 않았다. 그 순간 신도 하나가 소년을 가리켰다.
“아, 아, 악마다!”
그 소리침과 동시에 다른 신도들 사이에서도 그 말들이 퍼지기 시작했다. 그래, 악마야, 악마가 우리의 구원을 방해하러 왔어! 잔을 뺏긴 신도가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소년은 한숨 섞인 웃음을 지었다. 지팡이를 휘둘렀다. 쾅! 신도가 자신의 팔을 봤다. 한 쪽 팔이 날아간 것을 확인한 그가 비명을 지르려는 순간 소년은 그 역시 벽으로 날려버렸다. 그와 동시에 큰 비명소리가 들렸다.
“으아아아악!! 악, 악마를, 구원자님 도와주세요!”
신도들의 시선이 구원자를 향했다. 구원자가 악마를 쳐다봤다. 악마는 웃었다. 덩치 큰 신도가 구원자와 소년을 번갈아보며 쳐다봤다. 몇몇 이들은 구원자를 향해 도와달라고 외쳤고 누군가는, 함부로 나서지 못한 채 계속 소년을 보고 있었다. 소년은 진실을 아는 자와 진실을 알지 못하는 자의 구분을 명확히 해낼 수 있었다. 어찌됐든 아이들을 죽일 거란 건 모두 알고 있었으니. 그 생각까지 할 때 소년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인영을 보았다. 지팡이를 휘두르려 할까, 하다가, 달려온 이가 톰이란 걸 알고 멈췄다. 톰이 소년의 멱살을 잡았다.
“이, 이게, 무, 무슨 짓이야! 이게 뭔 소리냐고!”
비명. 배신감. 당혹감. 그 외 등등. 아이의 내부 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가여운 양들. 고민이 있고, 가족들과 관계가 좋지 못한 아이들은 유혹되고 순종되어 결국에 잡아 먹힌다. 가축이나 다름없는 취급이다. 소년은 웃었다. 그는 멱살을 잡은 손을 잡고, 놓아줄래? 다정하게 물었다. 대답해! 찢어지는 비명소리. 소년은 독촉하는 대신 눈을 휘며 말했다.
“설명이 더 필요하니? 우린 수면제를 먹고 자는 상태에서, 불태워질 예정이었단다. 그 구원을 위해. 애초에 교리서에서 구원의 대상은 신도들이고, 우린 ‘양’이었으니까.”
그 말에 어린 아이의 눈동자가 커졌다. 불쌍해라. 가장 오랫동안 지내왔고, 철썩 같이 어른들을 믿은 순진한 양. 멱살을 잡은 손의 힘이 풀렸다. 소년은 아이의 얼굴에 깃든 절망을 보았다. 소년은 그 손을 밀어냈다. 불쌍한 어린 양이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소년은 천천히, 걸었다. 구원자를 향해. 덩치 큰 남자가 벌벌 떨면서 소년을 막았다. 소년은 그 행동에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뒤를 돌아봤다. 소년이 뒤를 돌아보자 신도들이 순간 입을 막았다. 소년은 천천히 말했다.
“그래서? 33명이 교리에 나와 있는 숫자인 건 알겠는데, 그대들. 미성년자 아이들인 건 무엇일까. 양도 아니라. 아쉽게도 난 성인이 된지 몇 년 지나서.”
그 말에 뭐, 뭐?! 하는 외침이 튀어나왔다. 소년은 그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데려왔던 사람이었다. 소년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친구에게 인사하듯, 가볍게. 덩치 큰 신도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그 순간, 그 사람이 소리쳤다.
“저, 저자식을 잡아! 우리의 의식을 망치는 악마야! 구원자님을 위해 어서 죽여!”
그 말이 기폭장치가 된 듯, 신도들이 함성을 외쳤다. 우아아아! 그리고는 우루루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신도들이 소년의 손짓에 떨어져 나간 걸 알면서 무엇에 그렇게 용기를 얻은 걸까. 소년은 잠시 고민하다가, 구원자님을 위해. 그 단어를 떠올렸다. 소년은 아주잠깐의 불쾌감을 참아주기로 했다. 지팡이를 소매 속에 넣은 채 가만히 신도들이 자신을 붙잡길 기다렸다. 신도들이 달려들었다. 소년의 머리를 잡은 누군가가 그대로 뭉갰다. 아, 윽. 잠깐 부딪친 곳에 소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장면을 구원자는 모두 보고 있었다. 소년이 순순히 붙잡히자 신도들이 좀 더 자신감을 찾은 듯 다 같이 소리 높였다. 죽여! 목을 잘라! 불태워! 악마는 그렇게 죽여야 해!
“……죽…….”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이지…….”
그리고 곧 비명이 들렸다.
“죽이지 마!!!”
그 목소리에 신도 몇이 구원자를 쳐다봤다. 신도 하나가 웃었다. 구원자님은 가만히 계세요. 저희가 악마를 처리하겠습니다. 구원자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덩치 큰 신도를 쳐다봤다.
“아, 안 돼, 죽이지마…….”
“넌 가만히 있어.”
덩치 큰 신도가 냉정한 목소리로 구원자에게 말했다. 구원자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소년은 그 얼굴을 보았다가, 다시 힘에 억눌려 고개를 바닥으로 숙였다. 덩치 큰 신도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손짓했다. 몇몇 신도들이 일사분란하게 재단 뒤 커튼 너머의 무언가를 가지고 나오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이 과정을 겁먹은 채 보고 있었다. 커튼 너머로, 커다란 횃불 하나가 들려나왔다. 그걸 본 양 하나가 비명을 질렀다. 우, 우릴 불태울 거야! 그리고 황급히 뒤로 도망쳤다. 컨테이너 박스에 있는 단 하나의 문을 향해. 다른 신도가 아이를 막았다. 그걸 보고 아이들이 우루루 바깥으로 나가려고 뛰었다. 그 순간, 아이 하나의 비명이 울렸다.
“꺄아아아악!”
소년은 그 상황을 볼 수 없었지만, 짐작했다. 아이를 공격했겠구나. 이를 증명하듯 뒤에 한 신도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가려는 양들은, 다 이렇게 찔릴 거야, 알겠어?! 가만히 있어!”
소년은 자신의 머리를 누르는 손의 힘이 줄어든 틈새에 다시 고개를 조금 들어 올려 아이의 표정을 봤다. 일그러졌다. 혼란스럽고, 당황하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다시 아이에게 미소 지어주었다. 그 순간 또다시 머리가 바닥으로 눌렸다. 소년의 몸에 갑자기 무언가 끼얹어졌다. 소년은 냄새를 맡았다. 기름? 등 뒤에 소년을 누르고 있는 사람의 거친 숨소리가 느껴졌다. 헉, 허억, 헉. 텅, 텅텅. 동이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름을 부었습니다.”
덩치 큰 남자가 말했다.
“불을 지펴.”
헉, 허억, 여러 사람들의 거친 숨소리가 들렸다. 무언가에 불을 붙이는 소리가 들렸다. 뒤에 있던 아이들 중 누군가가 울기 시작했다. 구원자가 떨리는 몸으로 황급히 덩치 큰 신도를 붙잡았다. 안 돼, 태우지 마. 내 말 들어. 덩치 큰 신도가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구원자님이 왜이러실까. 당신은 구원만 하면 됩니다. 나머진 우리가 다 알아서 할 거니까. 구원자가 눈을 질끈 감더니 교리서의 구절을 읊었다. 그는 비웃었다. 백 번 읊어보십쇼. 과연 효과가 있을지. 구원자는 그 말에 결국 눈을 떴다. 그리고 신도를 붙잡고 소리 질렀다. 죽이지 마! 귀찮다는 듯, 덩치 큰 신도가 구원자를 잡고 밀어버렸다.
“불태우자.”
“악마를 불태워.”
“이 악마를 불태우면 다 해결될 거야.”
모두가 소리 높여 말했다. 횃불에 불씨가 붙었다. 아수라장이었다. 죽이면 안 된다고 외치는 구원자, 도망가려는 양들과 그런 양을 막기 위해 칼로 찌르는 신자들. 우는 목소리, 비명 소리, 외침. 악마는 웃었다. 소년을 잡고 있던 신도들이 황급히 소년에게서 멀어졌다. 소년은 고개를 들었다. 구원자를 보며. 불이 악마를 향해 다가왔다. 구원자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진다. 안 돼. 구원자의 입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지 마. 불씨가, 악마에게 쏟아지려 했다. 제발. 악마의 주변을 에워싸던 이들이 물러서고 불이 악마를 향해 던져졌다.
“안 돼!!!”
쾅!
아이의 비명과 동시에.
모든 신도들이 벽을 밀쳐졌다. 커다란 굉음이었다. 아이들은 날아오는 신도들을 보며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숙였다. 그러나 아이들 쪽으로 날아간 신도는 단 하나도 없었다. 문을 막고 칼을 쥐고 있던 신도가 어? 하고 멍하니 소년을 보았다. 횃불에 그대로 몸을 맞은 한 신도의 옷이 불타기 시작했다. 비명소리가 들렸다. 횃불이 날아가면서 떨어트린 불씨 때문에 바닥에 흐른 기름에 불이 붙고 있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 불에 타지 않고 있었다. 악마였다.
악마는 몸을 일으켰다.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멈췄다. 겁에 질린 눈동자들이 악마를 쳐다봤다. 악마는 그저 몸에 뒤집어쓴 기름들을 불쾌하게 보다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옷이 말랐다. 집에 가면 씻을래. 불쾌해. 악마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아, 이런. 악마는 문 앞에 있는 남자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남자가 문에 그대로 몸을 퍽하고 박았다. 악마는 구원자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를 향해 웃어보였다.
“네가 한 건, 결국 그래서.”
구원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니?
그 질문을 던지며 악마는 웃었다. 하하, 하하하하! 악마가 지팡이를 휘둘렀다. 문이 벌컥 열렸다. 양들이 순식간에 어떠한 힘에 의해 문 밖으로 떠밀려져 나가졌다. 그리고 곧 구원자 역시 악마에게 답하기도 전에 그대로 밖으로 떠밀러 갔다. 악마는 천천히 건물 밖으로 걸어 나갔다. 뭐야! 불에 타지도 않고, 정신을 차린 신도들이 밖으로 나가려고 뛰었다. 악마는 그런 신도들을 향해 지팡이를 몇 번이고 휘둘렀다. 밖으로 나오려는 이들이 다시 벽으로 밀쳐지고, 전부 다 안에 몰아넣은 후, 모두가 나온 걸 확인 한 후 보이는 모든 문들을 잠갔다. 문을 신도들이 두드린다. 사람들이 두드린다. 열어, 열어! 비명소리. 양들 중 성수를 먹었던 양들이 순간 바닥으로 쓰러졌다. 다른 양들이 양들을 향해 달려갔다. 양 중 우두머리 양이 울먹였다. 악마는 우두머리 양에게 말했다.
“괜찮아, 수면제뿐일 거란다.”
아마. 마약의 가능성을 떠올렸지만 악마는 이곳을 돌아다니는 내내 마약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우두머리 양이 떨리는 눈으로 악마를 쳐다봤다. 악마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악, 마, 라고?”
악마는 웃었다.
“말했잖니. 나는 악마라고.”
네가 구원자라면 당연히 나는 악마야. 다정하게 말하며, 악마는 구원자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하얗게 되어버린 머리카락. 본래의 머리카락은 까맣고, 눈동자도 까만데, 억지로 깃털을 하얀색으로 염색한 작고 가여운 새. 곧 악마는 다시 지팡이를 휘둘렀다. 안쪽의 잘 타는 재단을, 기름을, 신도들의 옷을 떠올리며, 아름다운 정화의 불꽃을. 컨테이너 박스가 불타기 시작했다. 악마는 눈을 잠시 감고 소리 없이 말했다.
[이제 신고해. 곧 갈게.]
[흐응? 알았어.]
물을 먹고 쓰러진 양들을 안은 채, 양들이 멍하니 불타는 컨테이너 박스를 보고 있었다. 불이 넘실거리며 안을 태우고 있었다. 안쪽에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리고, 수많은 벽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비규환. 악마는 지옥을 데리고 와 구원을 받아야하는 신도들을 태웠다. 구원자는 그런 악마를 막지도 못하고, 신도들을 구하지도 못했다. 악마는 몸을 돌려 양들을 쳐다봤다. 그리고 몇 발작, 다가갔다. 양들이 겁먹은 채 몸을 떨었다. 양 하나가 울음을, 터트리려 하자 다른 양이 울면 큰일 난다고 입을 막았다. 우두머리 양이 외쳤다.
“……아, 악마!”
“응, 나는 악마란다, 친애하는 그대. 그렇지만 난 아이들을 제법 좋아해.”
악마는 양들을 살폈다. 피를 흘리고 있는 양 하나를 발견했다. 악마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피를 흘리고 있던 양은, 겁먹은 눈으로 악마를 보다가 곧 자신의 상처가 나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무슨……?”
우두머리 양이 악마를 보았다. 악마는 웃었다.
“그래도 제법 즐거웠단다, 열흘간. 잘 자렴, 가련한 양들아.”
악마는 지팡이를, 휘둘렀다. 모든 깨어있는 아이들이, 미약한 공격을 받고 그대로 풀숲에 풀썩 쓰러졌다. 구원자가 멍하니 그 모든 장면을 보았다. 악마는 아이들 하나하나에게 마법을 걸었다. 일어나면, 그대들은, 이 장면은 전혀 기억하지 못할 거야. 단지 과거 이곳에서 지냈던 기억들만을 가진 채 있을 거다. 누군가에게 배신당했다는 것만을 기억한 채 나머진 기억하지 못할 거란다.
그리고 나 역시.
“이제 네 차례네.”
악마는 구원자를 보았다. 구원자가 가만히 악마를 쳐다봤다. 악마는 뒤늦게 구원자의 눈가에 눈물자국을 발견했다. 가만 보다가 악마는 그 눈가를 닦아줬다. 그 얼굴을 보다가 그는, 잠시, 웃었다. 결국 악마는 새를 꺼내주고 망가트리며 동시에 구하기도 했다. 어떡할까, 그대. 내가 그대를 구원자에서 끌어내리고 말았는데. 구원자는, 무언가 깨져버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악마는 충동적으로 물었다.
“……이대로 모든 걸 잊고 새로 시작할래, 아니면.”
나랑 같이 갈래?
바람이 불었다. 아비규환의 소리가 들린다. 천천히, 소리가 줄고 있다. 구원을 받으려고 모였던 이들이 불타 죽는 소리. 구원을 원하던 신자들은 정화의 불꽃으로 타올라 그들이 그렇게 말하던 천국으로 갈터였다. 어쩌면 아쉽게도 지옥에 갈지도 모르지. 악마는 그 소리를 들으며 구원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구원자가, 악마에게 물었다.
“……같이 가면……난, 어떻게, 돼?”
떨리는 목소리, 어눌한 발음. 자신의 의지가 아닐 때에만 분명한 목소리로 단어를 읊던 아이. 악마는 다정하게 답했다.
“잠깐 가족이 되는 거란다. 그대가 우리랑 영원히 지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안 하지만.”
“……왜, 영원히는, 아냐?”
“그대는 구원자고.”
평범한 ‘사람’이고
“나는 악마라서.”
나는 ‘악마’니까.
“그래도 갈래?”
악마가 다정히 물었다. 나는 제법, 네가 마음에 든 상태란다. 변덕이지만. 어차피 머글 어린 아이를 데리고 오래 지낼 수 있지도 않는 다는 걸 악마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말했다. 악마의 얼굴을 가만 올려다보던 구원자는
이내 손을 잡았다. 새는 새장 밖을 택했다.
“잘 부탁해, 아이리. 나는 덱스터 클루볼트란다.”
소년은 이윽고, 아이가 된 소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갔다.
7.
“다녀왔어. 아, 일단 씻어야겠다.”
소년은 순식간에 순간이동을 통해 집에 도착했다. 기름을 뒤집어써서 기분 나빠. 소년이 투덜대며 말했다. 그 목소리를 듣고 클라리체가 심드렁하게 그러던지, 하고 쳐다보지도 않고 답했다. TV에 연결된 게임 화면에 시선은 고정 상태였다. 방문을 열고 바질이 나왔다. 그는 소년의 옆에 있는 작은 아이를 발견했다.
“……주인님, 그 애는?”
“응? 아, 아이리. 한동안 같이 지낼 거야.”
언제까지인지는 나도 생각은 안 해봤고, 뭐, 슬슬 제 세상에 보내야겠다 싶을 때? 그 말을 들은 클라리체가 게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소년이 클라리체의 얼굴을 보며 빙긋 미소 지었다.
“이 아이 여자아이니까 클라리체가 좀 도와줄래?”
“보모 일을 하라고?”
어이가 없다는 듯 클라리체가 물었다. 소년은 어깨를 으쓱였다. 바질이 다가와 얼굴에 묻었다면 검은 떼를 닦았다. 소년이 가만히 그 손길을 받다가 다시 투덜거렸다. 얼른 씻을래. 그동안 클라리체가 몸을 일으켜 아이에게 다가왔다. 당황한 아이가 시선을 어찌 해야 할 지 모르고 당황한 채 굳었다. 소년은 잠시 고개를 숙여, 아이와 시선을 마주했다. 아이가 가만히 소년을 올려다봤다. 소년이 미소 지었다.
“이곳에 온 걸 환영할게, 아이리.”
“……열흘 동안 안 보이더니 무슨 짓을 한 거야?”
그 말에 소년은 잠깐 미소 지었다. 클라리체가 아이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아이가 당황했지만 더듬더듬, 말을 했다. 소년은 그 모습을 보다가 키득거렸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악마가 해야 할 일을 했지?”
일단 난 씻을래. 당황한 얼굴들을 두고 소년은 가볍게 욕실로 향해버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걸까요 저도 몰겠습니다 내용이 기니 천천히 읽어주세요 사실 안 읽으셔도 괜찮지 않을까요?
※중간에 유혈표현이 있지만 제가 묘사가 귀찮아서 대충 했답니다..만...막..사람 터지고 그러니까...불편하시면 피하시기... 그럼 이만....